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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으로 사랑하다

살면서 죽음에 대해 한 번쯤 꼭 알아야 하는 이유

by RAE_O_KIM 2020. 8. 28.

 

지구라는 혹성에서 살아가는 생명채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탄생과 죽음"

 

탄생이야ㅡ, 내가 원치 않아도 피할 수 없지만

죽음은 다르다. 죽음은 탄생과는 다르게, 내가 원해서도, 내가 원하지 않아도 맞이하게 되는 현상이다

 

오늘은 이 죽음에 대해 심리학과 철학적인 입장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죽음의 속성과 그 의미"


 

 

죽음

1. 생물의 생명이 없어지는 현상

 

죽음은 인간의 정신적 성숙과 함께 항상 그 문화와 정신에 담겨있었다.

 

 

인생의 세 단계와 죽음 - 한스 발둥 그린 151010년
인생은 짧은 꿈만 같다 - 아르놀트 뵈클린 1888년

(서양 미술사에 남아있는 바티 나스(덧없음, 무상함)를 주제로 한 명화 두 점

출처https://m.blog.naver.com/hyeonamsa/220596424592)

 

 

 

어떤 철학가는 인간을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라고 보았고

몽테뉴는 자신의 저서수상록에서 죽음에 대해

 

 

몽테뉴

르네상스기의 프랑스 철학자. 모랄리스트로 알려져 있다. 그는 회의론에서 출발했다. 이는 중세의 스콜라 철학이나 가톨릭 교회의 교의, 신 자체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었지만, 사물에 대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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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록

16세기 후반의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의 저술. 1580년 초판 간행. 원제목 《에세》는 그 당시 시험 ·시도(試圖) ·경험 등을 의미하며, 아직 수필이라는 장르의 명칭으로는 되어 있지 않았다. 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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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서 죽음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곳곳에서 기다리지 않겠는가! 죽음을 예측하는 것은 자유를 예측하는 일이다. 죽음을 배운 자는 굴종을 잊고, 죽음의 깨달음은 온갖 예속과 구속에서 우리들을 해방시킨다."


라고 이야기했다.

죽음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예정돼 있고. 예정돼있기에 의식의 순간엔 자유를, 구속에서의 해방을 경험하게 해 주나 보다

 

 

 

"몽테뉴의 말을 빌려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래, 죽음의 의미에 대해선 조금 알겠다.

그런데 몽테뉴가 말 한 "죽음에 대한 예측이란 무엇이고 이를 통해 얻는

"자유에 대한 예측"은 무엇을 두고 이야기 한 것일까?

 

 


 

피할 수 없기에 알게 될 수밖에 없는 것,

 

바로 죽음

 

살다가 한 번쯤 이러다간 정말 죽겠다 싶은 적이 있는가?

사람이 잘 살아있다가 어느 순간 찾아온 죽음의 두려움을 경험하게 되면

 

"이러다가 진짜 뒤지겠다"를 깨닫고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서 회귀하기 시작한다.

 

이를 두고 몽테뉴는 죽음을 예측하여 자유를 예측하고, 죽음을 배워 굴종을 잊는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인생의 회귀를 통해 심리적인 변화를 겪은 이들은 죽음이 항상 자신의 주변에 있음을 인지하며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자유를 소망하기 때문이다. 추가적인 설명은 아래서)

 

"죽음을 깨달으려면"


 

 

죽음을 깨닫는다.(이를 통해 구속에서의 해방을 얻는다..)

 

이 말은 단순히 죽음의 정의와 속성에 대해서 "알았다"일까?

 

아니다 이는

"죽음을 삶에 두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앞서 한 철학자는 인간을 두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라고 했다,

또한 우리는 가끔 살면서, 어차피 사람은 다 똑같이 죽을 텐데, 흙으로 돌아가고 먼지가 될 텐데,

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고, 내 입으로 뱉을 때가 있다. 그런 생각도 가끔 들고 말이다.

 

하지만 이 말들은 삶을 위한 생각이 아니다.

이런 말 들은 "죽음을 위한" 말들인 것이다.

 

 


 

죽음을 삶에 두지 않는다라..

이를 알려면 물체의 운동을 일컫는 키네시스와 에네르기아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한다.

 

키네시스란 목적지(계획)가(이) 있는 운동을,

에네르기아는 쾌락의 시점이 있는 현재이자 과정의 운동을 의미한다.

 

삶을 두고 생각했을 때 삶의 운동성은 키네시스일까 에네르기아 일까?

 

키네시스는 출발과 도착이 명백히 정의돼있는 운동으로, 예를 들어

마라톤, 모든 생명체의 운동(탄생과 죽음), 과학 등이 이에 속하게 된다.

 

에네르기아는 현재의 쾌락의 시점에 관점을 두는 과정의 운동으로

춤과 노래 등이 이에 속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은, 인생과 삶이란 어떤 운동이라고 생각되나?

 

 

 

키네시스

or

에네르기아

 

 

 

 

 

"죽음을 삶에 두지 않는 방법, 키네시스와 에네르기아"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에 대해 간략하게 말해보라고 하면

탄생과 죽음으로 많이들 이야기한다.

 

인생과 삶의 시작점을 탄생으로

종착점을 죽음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이는 인생을 키네시스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탄생을 시작으로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인생과 삶,

우리는 이렇게 삶을 키네시스적 관점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그 사이에서 죽음이라는 도착지에 도착하기까지 불완전한 탄생과 죽음의 양극 간의 과정은 쓸모없는 것이 된다.

 

 

즉 삶을 두고 키네시스의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삶은 죽음으로서 완성되는 것이다.

탄생을 시작으로 죽음으로 완성되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는 누구나 먼저 죽는 사람들이 "완성된 삶"을 산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삶을 두고 키네시스적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우리의 인생은 항상 불완전하고 불안하다.

완벽하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하다, 우리의 인생은 죽음으로 완전한 게 돼버리니까,

 

그래서 키네시스적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면 죽음을 통해 완전해지기에

삶을 영위하는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것들이 쓸모 없어지게 된다.

희로애락 이 모든 것이 쓸모가 없어진다.

한마디로 죽음을 삶에 두고 죽음을 위해 삶을 사는 게 돼버린다

 

(앞서 말 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라든지,

어차피 사람은 다 똑같이 죽을 텐데, 흙으로 돌아가고 먼지가 될 텐데,

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고, 내 입으로 뱉을 때가 있다. 그런 생각도 가끔 들고 "

ㅡ라는 말은 지극히 키네시스적인 말이다)

 

 


 

 

하지만 에네르기아적 관점에서는 아니다.

 

삶을 에네르기아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삶의 그 모든 순간순간이 삶 그 자체가 된다. 그 하루하루가 완전하게 된다.

희로애락이 내 삶에서 살아 숨 쉬게 된다. 죽음 또한 마찬가지이다.

 

마라톤에서 1등을 하고, 대회에서 성적이 좋아야만 행복할 수 있고, 완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삶이란 그 과정 속에 있는 1등을 하고자 노력했던 그 순간, 성적을 좋게 하기 위해서 공부했던 그 시간들

이 순간과 시간들 자체에 의미가 있기에 우리는 완벽하지 않아도, 불안하더라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이란 그 사건이 삶의 순간에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기에 우리는 죽음이란 순간을 경험하기 전까지

"지금"의 순간에 행복하길 노력하고, 그렇게 살아가며 생명의 생동감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과 삶이란 키네시스가 아닌 에네르기아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옳은 것이다.

 

(몽테뉴는 죽음을 배우고 깨달은 자들은 굴종을 잊고 구속에서 해방된다고 했다, 이는 지극히 키네시스적인말이다, 죽음은 삶의 과정 중 하나이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삶을 영위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 하루하루에서 자신이 주체가 되어 생각하고 행동할 터이니 굴종을 잊고 구속에서 해방된다고 한 것이다)

 

 

"에네르기아로 살아야 마음을 챙길 수 있다."


 

이렇게 에네르기아적 관점에서 삶을 살게 된다면 죽음에 대해 깨달아 구속에서의 해방을 경험할 수 있다.

 

키네시스적 관점에서는 언제나 죽음이 존재하고 죽음으로 완성되는 삶이기에 절대로 그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에네르기아적 점에서는 죽음 또한 삶의 일부이고 과정이기에 삶에 죽음을 (목적으로) 두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삶을 에네르기아로 살게 된다면 희로애락의 그 순간순간들이 모두 생명을 얻어 살 수 있게 된다.

 

키네시스로 사는 이들은 죽음이 완전하기에 그 과정은 무시된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희생되는 그 모든 것들은 의미가 없고 그 희생은 당연한 것이 된다.

그렇게 목적에 달성한 이들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알 수 없는 공허함과 외로움이다.

 

삶과 인생은 과정인데. 그 과정을 버렸고, 죽였고, 무시했기에 희생된 시간들이

목적을 달성하고 나서 후폭풍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키네시스로 살아온 인생에 남는 건 무엇일까?

바로 허무와 공허와 외로움이다.

그리고 달성한 목표. 그뿐이다.

 

하지만 에네르기아로 살아온 인생에 남는 것은

삶 그 자체다. 아프고, 즐겁고, 늙어가며, 사랑했던 그 모든 순간들이다.

(많은 연예인들이 공연 후 찾아오는 공허감과 우울함이 이와 연관돼있다. 연애활동 그 자체를 키네시스적 입장에서 바라본 것. 무대에서 내려온 그 순간도 인생의 한 부분인데, 자신을 위해 필요한 시간인데 말이다.)

 

 

 


 

 

최근 들어서 상담치료에서는 "마음 챙김"이 대두되고 있다.

마음을 챙기는 것, 순간순간 느끼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집중하고, 관심을 가지며 챙기는 것.

이는 삶을 살아가는 에네르기아와도 관점이 맞기에, 삶을 살아가며

마음을 챙기게 된다면 에네르기아적 삶을 영위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살면서 죽음에 대해 한 번쯤 꼭 배워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살면서 한 번쯤은 꼭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고, 배워야 한다.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니 삶에도 살아가는 방법이 있었고 이 방법을 알고 나니

 

 

 

 

삶을 살아가는 그 순간순간, 그 모든 시간들이 삶 그 자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렇게 우리는 이 순간을, 이 시간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고, 즐기고자 마음먹고, 슬프다며 울어도 볼 수 있게 됐다

 

 

 

살면서 죽음에 대해 한 번쯤 꼭 알아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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