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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으로 사랑하다

우리에게는, 성숙한 이별이란 없다

by RAE_O_KIM 2020. 6. 25.

이별

 

사람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수많고, 다양한 모양의 이별과 마주한다.

얼마나 다양하고 수많은지, 때로는 우리를 당황스럽게도 하며, 슬프게도 하는 "이별"

 

 

 

 

우리에게 이별의 순간은 항상 낯설게 다가온다


 

알고 있지만, 마주하게 되는 이별의 순간엔 항상 낯선 이별..

성숙한 이별이란 없을까?

 

 

 

 

정들었던 고향과, 대자연에서의 이별도 있지만

우리에게 항상 마음의 동요를 크게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 고향과, 그 자연에서 함께했던 사람들과의 이별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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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지만, 마주하게 되는 이별의 순간엔 항상 낯선 이별..

 

성숙한 이별이란 없을까?

 

생에 평생 함께 할 것만 같았던 사랑하는 이들과의 사별과

천재지변으로 인한 이별

자신들의 의무와 뜻을 위해 마주하는 이별(군입대, 종교인으로서 수양 등..)

 

 이렇게 다양하고 수많은 이별 속에서 성숙한 이별은

 

이별의 순간에 느끼는 감정과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

 

슬프면 슬픈데로, 허무하면 허무한대로, 기쁘면 기쁜데로 

그렇게 솔직하게 표현해 이별의 그 순간을 마주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별의 순간에 성숙하게 마주했더라도

이별의 후유증은 크게만 느껴진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타인에 의해서 존재하는 생명체로,

자신의 삶의 이유이기도 하고, 행복의 부분이었던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을 겨우 하루 가지고 잊을 순 없는 법.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별의 감정은 함께했던 시간의 행복만큼이나 크게 다가오고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스트레스 측정 척도(Holmes and Rahe stress scale)에 따르면

이별은 가장 강한 스트레스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만큼 오랫동안 우리의 마음을 옭아맬 수 있는 것이 이별이다.

 


 

 

크게 다가온 이별로 마음이 휑하고 터 빈 것 같고 허무한가? 

이별로 인해 마음이 슬픈가?

 

우리는 슬픈 마음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입 밖으로 꺼내야 한다.

마음에 스며든 슬픔에 대해서 토로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이별로 인한 슬픔에서 견뎌낼 수 있다.

 

 


슬픔을 토로하라.

그렇지 않으면 슬픔에 겨운 가슴은 미어져 찢어지고 말 테니

-셰익스피어<<멕베스>>


 

 

 

이별로 인한 상실감과 슬픔, 그리움의 감정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것은 

자신 스스로를 점점 감정의 구렁텅이 가운데로 몰아넣는 행위다.

 

감정의 무저갱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 별로 인한 슬픔과 상실함을

표현해야 한다.

 

그렇다고 이별의 사실이 달라지는 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슬픔은 자기 자신에게, 또는 타인에게든 어떻게든 표현되고 말해져야 한다.

 

 


 

정신분석가들은 이별에서 필요한 감정의 대체물은 바로 슬픔 그 자체라고 했다

사랑하는 이 가 떠나 남겨진 그 슬픔은 매우 가슴 아프지만, 

한 편으로 내가 슬퍼하는 과정을 통해서 아직 그 사람과 함께 있다는 묘한 심리적 안심을 얻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약, 이별로 인해서 슬프다면.

몇 년이 지나도 이별의 후유증이 쉽게 가시지 않는다면

 

어쩌면, 우리는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 게 아닌

"내가 보는 데로"사랑한 것 일수도 있다.

 

그러니, 그 사람에 대한 괜한 욕심과 집착을 이젠 벗어던지고

떠난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별의 과정이 힘든 이유는 과학적인 입장에서 두 가지 입장이 있다.

첫 번째는 원인적으로 보는 것으로, 사랑의 단계에 접어들었던 이별 대상과의 분열로 인해 보상받았던 뇌의 쾌락 중추가 이제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 이것에서 오는 상실감과 불안함이다.

두 번째는 목적으로 보는 것으로 자신이 바라는 대상과의 관계 유지가 너무 필요하기에 이별 대상에 대한 환상을 깨고 싶지 않고, 더 유지시키고 싶고, 이별의 순간을 아직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며

스스로가 계속 이유를 들며 다짐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두 가지 이유를 개별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으로 본다. 심신은 합이기 때문이다.

(육체의 요소와 심리적 요소는 서로 땔 수 없는 상호관계에 놓아져 있다)

(어디까지나 이별을 부정하는 당사자의 태도는 자신 스스로가 계속해서 이별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다짐하는 생각에서 오기 때문이다. 이 다짐에 육체의 영향 또한 있다고 본다.)

 

혹은, 아직도 자기 자신에겐 이별의 후유증이 필요한 건 아닌지 생각해보자.

차라리 이별로 인한 고통을 받기보단

스스로가 이별로 인한 고통을 필요로 하는것이 나을 것이다.

 

이별의 고통을 받는다면 우리는 영영 벗어날 순 없지만

이별의 고통을 필요로 한다면 그 고통이 필요치 않게 되는 그 순간을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그렇게 이별의 고통과 후유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별(離別)

떠나는 길이 다른 것.

오랫동안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서로 갈리어 떨어지는 것.

 

세상의 모든 이별을 헤아리고 싶어도 헤아릴 수 없음은,

이별은 예고 없이, 알 수 없을 때 찾아오고,

이별은 언제든 예정돼있기에

우리는 이별을 헤아릴 수 없고

이별 앞에서 성숙할 순 없다.

 

 

단지

예고 없이 알 수 없을 때 찾아오는,

언제든 예정돼있는, 이별을 두고 마주할 뿐이다.

 

 


 

 

그렇다. 우리는 만남의 순간에 이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요제프 이스라엘스<이별 전날>
뭉크의 <이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