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심리학으로 사랑하다

내가 네 앞에서 망설이는 이유: 나는 나를 더 사랑하거든

by RAE_O_KIM 2020. 7. 5.

개인심리학의 창시자 알프레드 아들러

 

사람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세 가지의 큰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일과 우정, 그리고 사랑이 바로 그 세 가지의 큰 문제다.

 

 


 

문제라는 어감보단, 과제라는 말이 맞겠다.

 

세 가지의 과제인 일과 우정과 사랑은

사람이 살면서 반드시 겪게되고,

언젠가 마주하게 되는 일생의 중요한 사건들이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노동을 통해 생존을 해야 하고

노동을 위해서는 타인과의 관계 유지가 불가피하다.

 (내게 "이 혁"이라는 이름이 있는 것 또한 타인이라는 존재가 존재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렇게

"나"라는 존재는 타인의 존재가 있기에 성립되는 존재인 것이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이들은 우정과 교우관계를 통해 좀 더 풍부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

이렇게 풍부해진 삶은 사랑을 통해 더욱더 깊어지게 된다.

 

 


 

 

지금 이 순간

지구의 어딘가에서는 새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울음소리가 울리고 있다.

이제 막 세상과 마주하게 된 이 아이의 이름은 이 혁

 

혁이에게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알아서 밥 먹여주고 한번 울어주면 헐레벌떡 시중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혁이는 부모님이 이혼하더라도, 부모님이 없더라도 잘 살아남을 것이다.

자기 자신의 목적 달성과 생존에 관심이 아주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이는 자신의 주어진 환경 속에서 생존을 통해 대인관계 기술을 익히고 배우며 자라난다)

 

인간이 살면서 가장 강력할 때는 바로 이 "아이"의 순간이다.

아이는 자신의 연약함과 울음으로 사람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움직이게 한다.

자신의 존재성을 가지고 상대방을 쥐락펴락하는 아주 막강한 존재인 것.

 

우리는 이렇게 인생에서 우주의 중심점으로 태어나 자라기 시작한다.

우주의 중심점에서 태어난 우리는 자립하기 전까지

아직도 자기 자신이 아이 때처럼 우주의 중심인 줄 알고 살아간다.

 

자신이 바라는 목적과 욕심의 귀결이 자기 자신에게 까지만 발전된 아이는 그렇게 이기적이고 교만하게 자라난다.

사실 주변만 돌아보면 나와 같은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걸 알 텐데. 

어떻게 알겠는가?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기에 타인에게 관심도 없단 걸 말해봐야 소용없다.

거만하기에 자신이 가르치려 하고, 다른 사람의 과제에 간섭하는 게 일상이다.

타인의 고통과 힘듦에 관심이 없고 타인의 마음에 감동을 일으킬 줄 모른다.

(한마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관심이 없거나 그 표현이 미숙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태어나서 "우주의 중심"인 양 살아간다.

하지만 주위만 둘러보면 "우주의 중심"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70억이 넘는다.

한 마디로 "나"는 우주의 중심이 아닌 우주의 "구성원"이었던 것.

 

이걸 빨리 깨닫는지, 깨닫지 못하는지에 따라 타인을 사랑하는 방식의 성숙도가 달라진다.

 

우리는 어느 순간 알게 된다.(깨달음의 순간은 다르나)

나는 인류의 구성원이고 절대로 혼자 살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많은 이들이 혼자 외로워하거나 흔히 아싸(라는 표현을 빌려)의 경험을 지독하게 겪다 보면서 알게 되거나, 혹은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려 애쓰다가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자신이 우주의 중심인 줄 알았다가 먹고살려고 하니 도저히 혼자 먹고살 순 없는 거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과 협력을 통해 "사회성"이라는 "공동체 감각"을 배우고 익히게 된다.

 (혼자 먹고사는 것보다 타인과 협력으로 먹고사는 게 생존에는 당연히 이득인 것..)

그렇게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알아가는 사람들 중에!!

사랑과 우정의 과제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게 되는데..

 


 

그들에게 있어 타인이 어려운 이유는

일단 타인은 내가 아니고, 나와는 너무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같은 소나무라고 하더라도 생육환경이 다르면 생육의 차이가 나타나듯 사람도 마찬가지인 거다.

그렇게 다른 둘이 협력하고자 하고 더욱이 사랑하고자 하는데 얼마나 어려울까?

 

그러면, 타인이 내가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타인이 관심 갖는 것에 나 또한 관심과 애정을 갖는 것이다.

 

 


 

 

 

 

그렇다.

타인에게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타인에게 관심과 애정이 없기 때문(부족하거나, 방식이 미숙하거나)이고 항상 자신의 위치가 피지배자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자신이 스스로 노력해서 인간관계를 개선하고자 용기를 낸 적이 드물었다는 뜻)(또는 타인과의 관계가 멀어질까 두려워 타인의 말에 무작정 수긍함으로.. 이것도 결국은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한 매우 어리숙한 생각이다)

 

타인에게 관심과 애정이 없다는 말은 한마디로 타인을 존중하는 법을 모른다는 말이다.

타인을 존중할 줄 모르니 어떻게 서로의 관계가 발전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아직도 자기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상태라면 더더욱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기는 스스로에게 너무 불안한 선택이고, 아쉬운 선택으로 남는다.

 

 

 


 

 

 

결국은 타인을 사랑하고 관심을 갖는 건 "나"보다 "너"에게 관심을 가지고, 애정을 갖는 것이다.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불안과 걱정을 재료 삼아 어떻게 해서든 

여러 가지 인과관계를 만들어내서, 자신이 공동체 감각이 부족한 걸 합리화 하기 시작한다.

(개인심리학에서는 이를 "겉으로 보이는 인과관계(A라면 B다)를 들어 자신의 목적에 맞게 속였다" 라고 표현한다)

그렇게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한 발짝 떨어져 거리를 두는 것이다.

 

나는 나 살기도 바쁜대 왜 다른 사람까지 신경써야하는건데 진짜 이해안되네 빼애애애액!!!...

(그러니까 네가 잘 살려면 다른 사람까지 신경 써야 한다니까... 제발 말 좀 들어...!)

 


 

타인의 애정과 관심에 나 또한 그러기는 정말 힘든 일이다.

그래서 우정도, 사랑은 더욱 더 힘든 거다

자기 중심성에서 탈피해, 타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그 마음.

타인이 있는 그대로 아름다워 보이는 그 눈을 가지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바로 타인의 존재로 내 존재의 이유가 생긴 다는 걸 깨닫기 전에는 말이다.

 


사랑하는 이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을 최선의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힘은 크고 대단하고 어쩌면 아름다우면서도 아픈 것이다.

 

에드워드 헨드 코보울드 - 그네